존재만으로도 든든한 버팀목
회장님께서 떠나신 자리에서, 회장님에 대해 추억하고 그리워할 거리가 많았으면 좋겠다. 아쉽게도 이제는 추억을 쌓을 수 있는 기회조차 없어졌으니, 후회해도 소용없는 일이지만 못내 아쉽고 죄송스러울 따름이다. 기억 속의 회장님은 말씀이 없으신 인자한 할아버지셨고, 일반인들은 감히 엄두조차 낼 수 없는 수많은 업적을 내신 존경스러운 분이셨으며, 그저 존재만으로도 든든한 버팀목 같은 분이셨다.
송원과의 인연은 대학교 2학년 때인 1996년도에 시작되었다. 처음엔 송원 장학금을 탄 일이 그저 큰 행운이라고만 생각했을 뿐 특별한 의미를 두지는 않았다. 그러던 중 3학년 여름, MT에 참석하지 않으면 장학금을 지속하지 않겠다는 말을 듣고 허둥지둥 짐을 싸서 함께 여행을 갔다. 그때의 가족 같은 따스함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선배들은 가족과 함께 참여했는데, 서로가 모두 왁자지껄 허물없이 여행을 즐기는 모습은 가족 그 이상이었다. 나는 이후 너무나 선하고 따뜻한 사람들에 반해서 모임도 자주 나가고, 기수 대표도 되었다. 선후배들과 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 회사로 세배도 가고, 유치한 게임이지만 모두 함께 즐겁게 즐겼던 여름 MT도 무사히 마쳤다.
그리고 대학교 4학년 때 IMF 경제 위기가 닥쳤다. 저주받은 학번이라는 우스개도 있을 정도로 참 힘든 시절이었다. 취업도 어렵고 아르바이트도 끊겨 대학생들에게도 우울한 시기였지만, 기업들도 구조 조정의 칼바람이 매섭게 몰아치던 때여서 대학에 지원하던 장학금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이렇게 온 나라가 힘들 때 회장님은 오히려 장학금을 올려주셨다. 등록금을 웃도는 금액이 아니었다. 그때 회장님은 “내가 주는 장학금은 등록금이 아니라 생활비이다. 학생들이 힘들 테니까 올려 준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 당시 어떤 회사를 어떻게 운영하고 계신지 전혀 모르던 나는 막연히 고맙다고만 생각했는데, 지금 돌이켜 보면 회장님의 회사도 좋은 상황은 아니었을 텐데 어떻게 장학금을 올려 줄 생각을 하셨을까. 나 같은 범인(凡人)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공부를 더 하고 싶으면 더 하라고 말씀하셨다. 우리 장학생들의 대학원 진학은 더 지원하겠다고 말씀하셨다. 더 공부할 생각은 꿈도 꾸자 못했던 내게 이렇게 나라의 녹봉을 먹는 연구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주신 분이 바로 회장님이셨다.
비단 내게만 이러한 기억이 있지는 않으리라. 송원의 이름으로 장학금을 받던 수많은 사람들도 자기 나름의 감사한 추억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졸업 무렵에는 취업 준비, 취업해서는 일, 또 결혼하고 아이 낳고 기르면서는 일상이 바쁘다는 핑계로 송원에 너무 소홀했다. 해마다 신년회 겸 신입생 환영회, 여름 MT, 송년회 문자를 받고도, 늘 마음 한구석에 미안함을 가지고는 있었지만 정작 참석하지는 못했다. 그저 OB들이 십시일반하여 장학생 한 명이라도 더 지원을 해 보자는 취지에 동의하며 조금씩 보태는 일로 자기 위안을 삼았다. 그렇지만 송원과 회장님에 대한 고마움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회장님께서 기억조차 못 하시는 수많은 장학생들은 회장님의 삶을 보면서 이 세상 어디에선가 소금으로, 밀알로, 등대로 살아가고 있으리라 믿는다. 나 또한 송원이란 이름을 가슴에 담고 송원이라는 이름에 누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있다. 많은 것을 가졌다고 많은 것을 베풀며 살지 못한다. 회장님은 이미 회장님이 지니신 것보다 훨씬 더 많이 베푸셨다. 회장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살아 계실 것이고, 송원장학회는 다른 으들의 삶에 관심을 가지고 도움을 실천하는 인재를 기르며 당신의 뜻을 이어 나갈 것이다.
회장님께서 마지막 병상에서 수도 없이 되뇌시던 그 말씀이 떠오른다.
바르게 살아라, 성실하게 살아라, 최선을 다해 살아라.
바르게 살겠습니다. 성실하게 살겠습니다. 최선을 다해 살겠습니다.
걱정 마세요. 우리는 송원의 장학생이니까요.